Matthew 9 : 치유의 목적

치유의 430 matthaeus 9 목적Matthew 9는 마태 복음의 다른 장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에 관해보고합니다. 이것은 무질서한 보고서 모음이 아닙니다. Matthew는 때로 역사를 역사에 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훌륭한 보완 물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인 예를 통해 영적 진리가 제시됩니다. 9 장에서 마태 복음은 마가 복음과 누가 복음에서 찾을 수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요약 해 놓았지만 마태 복음의 가르침은 훨씬 더 짧고 간결합니다.

죄를 용서할 권세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을 때, “그들[몇몇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 믿음으로 그 사람들은 그를 낫게 하려고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중풍병자의 가장 큰 문제는 중풍병이 아니라 죄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것을 돌보셨습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 사람이 하나님을 훼방하는도다”(3절).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이런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여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리고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V 5-6). 신성한 용서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실제로 허락되었는지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분의 지상 사명은 모든 사람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에 있는 모든 병자를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로 죄의 용서를 알리는 것이었고, 그가 용서의 원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적은 육체적 치유를 예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치유를 예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백성이 이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렸다”(8절) –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죄인들과 먹기

이 일이 있은 후, “그[예수님]는 세무서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했다: 나를 따르라! 그가 일어나 예수를 좇으니라”(9절). 마태가 세관에 앉았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지역을 통해 상품을 운송하는 사람들로부터—어쩌면 어부들이 잡은 것을 도시로 가져와 팔기까지 했을 것입니다—에게서 관세를 징수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로마인이 고용한 세관원이자 통행료 징수원이자 "고속도로 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 잘 버는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친구들과 함께 잔치에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으니라”(10절). 그것은 멋진 마피아 맨션에서 파티에 가는 목사와 같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사회에 계셨는지 관찰했지만 그분과 직접 대면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b절)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를 쳐다보았고 마침내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것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십시오(호세아 6,6): »나는 자비를 기뻐하고 희생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절). 그는 용서할 권세를 가졌습니다. 영적 치유도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의사가 병자들을 위해 중재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들을 돕기 위해 오신 죄인들을 위해 중재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거룩하라고 부르셨지만 부르시기 전에 온전해지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판단보다 은혜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남을 판단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은혜를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다 행하되(예를 들어 제사) 드려도 은혜를 베풀지 못하여도 실패한 것입니다.

옛것과 새것

바리새인만이 예수님의 사역을 경이롭게 여겼던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절)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가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금식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혼인집 하객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어찌 슬퍼하리요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금식할 것입니다”(V 15). 내가 여기 있는 한 이유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이 강제로 "그들에게서 빼앗길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잠언을 주셨습니다. 헝겊이 드레스를 다시 찢어 버리고 찢어짐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가 썩을 것이다.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이 함께 보존되느니라”(16-17절). 예수님은 확실히 경건한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규정을 "고정"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한 제사에 은혜를 더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존 규칙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죽은자를 키우고 불순한자를 고치며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교회의 장로 중 하나가 나아와 엎드려 이르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시면 살겠나이다 하니”(v절) . 18). 여기 우리는 매우 특이한 종교 지도자, 즉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셔서 그 소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25절).

그러나 여종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병 고침을 받으려고 나아왔다. 그 여자가 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으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내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여자가 같은 시간에 나았다”(20-22절). 그 여자는 혈루증 때문에 부정하였다. 모세의 율법은 아무도 그녀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행동 방침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녀를 피하는 대신 그녀가 그를 만질 때 그는 그녀를 치유했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믿음이 그녀를 도왔습니다.

믿음은 그 남자들로 하여금 중풍에 빠진 친구를 그에게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믿음은 Matthew가 직장을 그만 두도록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믿음으로 한 종교 지도자는 자기 딸의 ​​부활을 간구하고, 여자의 혈루를 낫게 해 달라고 간구했고, 소경은 예수님께 보시기를 간구했습니다(29절). 모든 종류의 질병이 있었지만 치유의 근원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영적 의미는 분명합니다 : 예수님은 죄를 사 하시며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고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새로운 포도주는 이전의 모세 율법에 쏟아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별도의 일이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입니다.

마이클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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