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태어났다.

죽어 태어난 306기독교 신앙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미리 정해진 곳에서 육신이 되어 우리 인간 가운데 사셨다는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예수는 매우 놀라운 성품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분이 인간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자에게서 나신 육신의 하나님이 실은 사람이셨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1,14; 갈라디아서 4,4; 필리핀 사람들 2,7; 히브리서 2,17). 그는 실제로 인간이었습니다. 2월 일의 전통적인 달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실제로 마리아의 임신과 함께 시작되었더라도 일반적으로 크리스마스에 축하됩니다.5. 월, 수태고지 축일(이전에는 강생 축일 또는 신의 강생 축일이라고도 함).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이 우리의 믿음에 중요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믿음의 메시지에서 그것이 첫 번째 자리는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설교할 때 그는 훨씬 더 자극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1. 고린도 1,23).

그레코 - 로마 세계는 태어난 신들의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로테스크 한 - 그들이 처형 된 범죄자만을 믿는다면 사람들에게 구원을 부여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자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어야합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고 나서야 부활을 통해 영광을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에서 선언했습니다. 5,30-31).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야기의 난처한 부분인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나니"라는 말을 언급하는데 실패하지 않았습니다.1,23 "... 매달린 사람은 신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런! 베드로는 왜 이 문제를 제기해야 했을까요? 그는 사회정치적 절벽을 우회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 부분을 의식적으로 포함시켰다. 그의 메시지는 예수님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이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죽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메시지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설교할 때, 그는 그의 설교의 중심적인 관심이 그리스도의 죽음 그 자체로 이해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1. 고린도 1,23).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명백히 특히 생생한 표현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3,1). 바울이 그토록 무서운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왜 그렇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성경은 그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의 확실한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게 필요한가?

왜 예수님은 처음에 그토록 끔찍한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이 질문을 길고도 어렵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 안에 메시아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저주로 여기는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도록 내버려 두셔야 합니까? (그래서 무슬림들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그가 선지자였고, 하나님은 그 자격으로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거의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 대신에 다른 누군가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다. 계속 ~이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를 위한 다른 길이 있기를 기도하셨지만 없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단지 하나님께서 "일어나도록 정하신" 일, 즉 그가 이 저주받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사도행전 4,28; 취리히 성경).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즉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책망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 곧 복음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3,13). 예수님은 우리 각자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참아야 할 고통과 수치를 짊어지셨습니다.

기타 유추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비유가 아니며 바울은 그의 서신 중 하나에서 이 특정한 견해를 언급할 뿐입니다. 더 자주 그는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언뜻 보기에 여기에서 선택된 문구는 단순한 교환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했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원하여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 인간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로마서 6,3-5). 이 유추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하여(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 참여적(즉, 우리는 그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의 죽음에 참여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받았고,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자신이 선택한 또 다른 비유는 대속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10,45). 마치 우리가 원수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자유를 보장한 것처럼.

바울은 우리가 중죄되었다고 말하면서 비슷한 비교를합니다. 이 용어는 노예 시장을 읽는 독자들과 이집트 출신의 이스라엘 출신 사람들을 상기시켜줍니다. 노예로부터 노예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롭게 사셨다. 아들을 보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스럽게 샀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해 형벌을 받았습니다.

골로새서 2,15 비교를 위해 다른 이미지가 사용되었습니다. “... 그는 당국과 권력을 완전히 무장 해제하고 공개적으로 전시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분 안에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Elberfeld Bible). 여기에 그려진 그림은 승리의 퍼레이드를 나타냅니다. 승리한 군사 지도자는 무장 해제되고 굴욕적인 죄수들을 쇠사슬에 묶어 도시로 데려옵니다. 골로새서의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모든 대적의 권세를 꺾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

성경은 확고하게 확립 된 불변의 믿음의 형태가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성경이 중대한 요점을 분명히하기 위해 사용하는 많은 이미지 중 하나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적인 죽음입니다. 죄가 여러 가지로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사시는 예수님의 사업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율법을 어 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십자가 형에서 처형되는 행위를 우리가 인식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속죄 제물을 보게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오염 시키면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정복한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승리자 인 우리 구세주 이십니다. 적 그리스도가 뿌리는 곳마다 예수님은 화해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그것 안에 무지 또는 어리 석음의 표시를 보는 경우에, 계시 및 지혜를주는 예수는 예수이다. 이 모든 그림들이 우리에게 도움이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진정됩니까?

경건치 아니함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것이요 그 날은 그가 세상을 심판하실 "진노의 날"이 될 것입니다(로마서 1,18; 2,5). “진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8절).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이 변화되는 것을 바라시지만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대적하면 징계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진리에 자신을 닫는 사람은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화난 사람이 화를 가라앉히기 전에 달래야 하는 것과는 달리,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히 전멸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결과를 가지고 예수님께 바쳐졌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2. 고린도 5,21; 취리히 성경).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고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에게 넘어갔을 때 그의 의가 우리에게 넘어갔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저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같은 구절).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의 계시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게 하십니다(로마서 1,17). 그분은 우리의 죄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돌보십니다. 십자가는 두 하나님의 의의 표징입니다(로마서 3,25-26)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5,8). 그것은 죽음에 의한 죄의 형벌을 적절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의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용서하는 사람이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랑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고통과 수치라는 개인적인 대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개인적 교제의 회복)을 얻으셨다(골로새서 1,20). 우리가 원수였을지라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로마서 5,8).
정의는 법을 준수하는 것 이상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돕도록 요구하는 법에 복종하지 않았지만, 그는 도움을줌으로써 올바르게 행동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 많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그 일을 하셨습니다. "... 그는 우리 죄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 요하네스 2,2).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의를 주시어 의롭게 행하십니다. 왜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1. 고린도 1,3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그에게 넘어가고 그의 의를 얻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3,9).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 앞의 의를 말하노라. 여기에 차별이 없나니 그들은 다 죄인이라 하나님과 함께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이 그를 믿음으로 세우사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제를 삼으셨으니 이는 그가 오래 참으시는 날에 전에 지은 죄를 사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시고 의로우신 것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니라"(로마서 3,22-26).

예수님의 속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를 믿는 사람만이 그에 따른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우리의 것으로 인식합니다(우리가 참여하는 우리 대신 그가 겪으신 죽음으로). 그의 형벌과 같이 우리도 그의 승리와 부활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진실하십니다. 자비롭고 공의로우십니다. 죄는 죄인 자신만큼 간과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보서 2,13).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온 세상을 화목하게 하셨으니(2. 고린도 5,19).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온 우주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골로새서 1,20).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글쎄요, 그것은 우리가 구원이라는 용어와 연관시키는 어떤 것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태어났다.

결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구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가 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려 하심으로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죽게 2,10). 그는 우리를 구속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므로 또한 그와 같이 받아 들이셨으니 이는 자기 죽으심으로 사망을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권세를 없이하시고 또 사망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온전히 속량하려 하심이라. 하인이 되십시오"(2,14-15).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2,9).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너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1. 베드로 3,18).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하신 일을 생각할 수있는 기회를 많이줍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관련되어"있는 방법을 아주 자세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입니다. 그가 죽으 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십자가의 또 다른 양상을 채택하고 싶습니다 - 그것은 모델의 것입니다 :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 요하네스 4,9-11).

Joseph Tkach 저


PDF죽을 때까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