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무덤 : 당신을위한 것은 무엇입니까?

637 빈 무덤빈 무덤의 이야기는 성경에 네 복음서 각각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께서 약 2000 년 전에 언제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부활 시키 셨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이 사건이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목수 인 예수는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을 믿었습니다. 그런 다음 고문당한 그의 시체는 단단한 바위로 만든 무덤에 놓여져 입구 앞에 무거운 돌로 봉인되었습니다.

로마 총독 본 디오 빌라도는 무덤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 렸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덤이 그를 붙들 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 하셨고 빌라도는 죽은 사람의 추종자들이 시체를 훔치려 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기를 잃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지도자의 잔인한 끝을 보았습니다. 거의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시간 동안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들은 폭행당한 시체를 십자가에서 빼내어 재빨리 아마포로 감쌌습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있을 때만 임시 장례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 후에 돌아와 예수님의 시신을 적절한 장사를 위해 준비 할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차갑고 어두운 무덤에있었습니다. 일 후, 수의는 임박한 죽은 살의 부패를 덮었습니다. 그 에게서는 전에는 없었던 부활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자 나인의 과부의 아들 인 나사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인간 존재를 회복시키는 방식은 아니 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소생 된 것으로 자신의 옛 몸으로 돌아 가지 않으 셨습니다. 장사 되신 아버지 하나님 께서 사흘 만에 예수님을 새 생명으로 살리 셨다는 말은 완전히 다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이것에 대한 결정적인 유추 나 그럴듯한 내세 적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수의를 접 으시고 무덤에서 나와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다시는 동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없는 진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지상에서 우리와 함께 사셨을 때, 그는 우리 중 하나였으며, 굶주림, 목마름, 피로, 필멸의 존재라는 제한된 차원에 굴복하는 혈육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그는 우리 중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령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또한 영원한 말씀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정신의 한계를 감안할 때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고 불가능할 수도 있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되실 수 있습니까? 동시대 신학자 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허구의 어떤 것도 이 성육신의 진리만큼 환상적이지 않습니다."(Knowing God). 그것은 우리가 평범한 현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과 모순되는 개념입니다.

과학은 어떤 것이 설명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리학의 최전선에있는 과학자들은 기존의 논리를 뒤집는 현상을 받아 들였습니다. 양자 수준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을 규제하는 규칙은 무너지고 새로운 규칙이 적용됩니다. 비록 그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논리와 모순 되더라도 말입니다. 빛은 파동과 입자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입자는 동시에 두 위치에있을 수 있습니다. 일부 아 원자 쿼크는 "돌아 가기"전에 두 번 회전해야하는 반면 다른 쿼크는 반 회전 만하면됩니다. 양자 세계에 대해 더 많이 배울수록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그러나 실험 후 실험은 양자 이론이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물리적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으며 종종 그 내부의 세부 사항에 놀라곤 합니다. 우리는 신성하고 영적인 현실을 조사할 도구가 없습니다. 이 일들은 예수께서 친히, 그리고 그분이 전파하고 기록하도록 위임받은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성경, 역사,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증거는 예수가 하나님 및 인류와 하나라는 믿음을 뒷받침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어 우리가 하나가 되고 내가 그들 안에 내가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사 저희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아버지 같이 사랑함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나를 사랑해.”(요한복음 1장)7,22-23).

예수님이 자라 났을 때, 두 본성은 함께 사는 새로운 차원에 이르렀고, 그것은 더 이상 죽음과 타락에 굴복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창조로 이어졌습니다.

무덤에서 탈출

이 사건이 있은 후 여러 해, 아마도 60년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참석한 최초의 제자 중 마지막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이제 노인이 되어 밧모 섬에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산 자니 그리고 나는 죽었고, 보라, 내가 세세토록 살고 있노라, 아멘! 그리고 나에게는 음부와 사망의 열쇠가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17-18 정육점 성경).

예수님이하신 말씀을 매우주의 깊게 다시보십시오. 그는 죽었고 지금은 살아 있고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무덤에서 탈출 할 수있는 길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조차도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부한 표현이 된 다른 구절에서 놀라운 약속을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영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 셨을 때, 그의 두 본성은 새로운 종류의 창조로 이끄는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죽음과 타락을 당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인간입니다.

더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이 제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저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기를 원합니다.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느니라"(요한복음 1장)7,24). 약 33년 동안 필멸의 삶을 함께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불멸의 환경에서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비슷한 메시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니라. 내가 확신하건대 이 시대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7-18).

예수는 필멸의 존재를 초월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유일한 사람이 되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가 택하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우리는 아직 그 영향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안전한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드러날 때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1. 요하네스 3,2). 그의 것은 우리의 것, 그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삶의 방식.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이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 께서 인간을 위해 염두에 두 셨던 모든 완전성을 성취 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거기에 혼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장)4,6).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을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 몸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3,21).

경전을주의 깊게 읽으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흥미로운 미리보기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한 곳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기억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시나이까 당신은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나이다 하시니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실 때에 자기에게 복종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라”(히브리서) 2,6-8).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8,5-7 세기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사들보다 조금 못한 예수를 죽음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심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8-9).

예수 그리스도 께서 부활절에 나타나신 여성과 남성은 그의 육체적 부활뿐만 아니라 그의 빈 무덤 발견에 대해서도 증거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참으로 개인적으로 육체적으로 그의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께서 더 이상 필요로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비어있는 무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에게 침례를받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묻혀 그의 새 삶에서 그와 함께 발전 할 수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가 얼마나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담이되는지; 생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 여전히 우리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께서 이미 죽으 셨던 우리의 모든 걱정, 짐, 두려움, 우리는 그의 무덤에 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충분한 공간이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사랑의 관계로 우리 모두에게 돌이킬 수없이 자신을 묶고 삼일 하나님의 삶과 교제 안으로 일어나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의 계획이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가 해냈어!

작성자 : John Halford 및 Joseph Tk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