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지 않다

705 그건 공평하지 않아불공평해!" -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거나 스스로 말할 때마다 수수료를 내면 아마 부자가 될 것입니다. 정의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희귀한 상품이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우리 대부분은 삶이 항상 공평하지 않다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분개하는 만큼 이기적인 동료들에게 속거나, 속이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이용당할 준비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군중은 기름부음받은 왕에 대한 전통적인 경의로 그를 환호하고 종려나무 잎을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며 호산나라고 외쳤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나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만나 앉으시니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함과 같으니라 보라, 네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나니"(요한복음 1장)2,12-15).

큰일 났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후에 군중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이것은 결코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모두 사랑했습니다. 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으므로 죽임을 당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의 거짓 증언과 부패한 대표자들은 사람들을 그에게 불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음속으로 우리가 항상 적절하게 행동하지 않더라도 공정하게 대우받을 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상하게도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 복음도 항상 공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받을 자격이 있는 죽음을 주시지 않고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 용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하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제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선을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물며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으리요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이제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더 구원을 얻으리요"(로마서). 5,6-10).

은혜는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부여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고 감사하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에 대한 감사는 우리 죄를 스스로 담당하셨고, 우리를 용서하셨으며, 심지어 우리에게 자신 및 서로와의 교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하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삶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종종 느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면 내재된 좋은 소식에 담긴 불의에 대해서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불공평하지만 정말 듣고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소식입니다.

Joseph Tkach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