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6 : 산상 수훈

마운트에 393 matthaeus 6 설교예수님은 내면의 의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의로움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불안한 말로 우리에게 분노, 간음, 맹세, 보복에 대해 경고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5장).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지침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의 의로움은 바리새인들의 의로움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진정한 정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태복음 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종교를 쇼로 정죄하심으로써 이 문제를 분명히 하시는 것을 봅니다.

비밀의 비밀

“너희 경건을 조심하여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백성으로 칭찬하게 하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게 하지 말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1-2절).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를 겉치레로 꾸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선행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얻는 전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단지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여론에 좋게 보이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지 않을 태도. 종교적 행동은 오늘날 강단에서, 사무실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거나 교회 신문 기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성실한 서비스처럼 보이지만 태도는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숨겨지지 않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3-4절).

물론 우리의 "손"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관용구를 사용하여 자선을 베푸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나 자기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그것을 합니다. 사랑은 비밀리에 행해져야 한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앞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우리의 선행이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6). 초점은 우리의 외부 영향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의 동기는 우리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은밀한기도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5-6절). 예수님은 공중 기도를 금지하는 새 계명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때때로 예수님도 공개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요점은 우리는 단지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거나 여론이 두려워 기도를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지 자기를 잘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7-8절).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지만 우리는 그분께 구해야 합니다(빌립보서 4,6) 그리고 인내하라(누가복음 1장)8,1-8). 기도의 성공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단어 수에 도달하거나 최소 시간 프레임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며, 특별한 기도의 자세를 취하거나 좋은 말씀을 선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한 기도의 예를 주셨습니다.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디자인도 환영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당신의 왕국이 오십시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 이 기도는 단순한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복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전능하신 아버지께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가게에 가서 빵과 다른 것들을 살 수 있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그에게 의존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12-13절). 우리는 음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관계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종종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 기도는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 거인이 아닙니다. 유혹에 저항하려면 신성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서로 용서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의 실패가 얼마나 큰지 더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고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14-15절). 이제는 경고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할 때까지 나는 이것을하지 않을 것입니다."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용서하는 데 그다지 능숙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완벽하게 용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도 하지 않으실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용서를 조건부로 하셨는데, 우리는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용서를 우리의 용서에 조건부로 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용서할 때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끝없는 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용서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데 기반을 둔다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하는 일, 즉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6,14문자 그대로 -15를 취하십시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고려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우리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온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마태복음 6장은 우리의 용서가 조건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의 죄가 이미 용서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용서를 게을리하는 죄도 포함됩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한쪽의 구절이나 다른 쪽의 구절을 오해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대화에서 과장의 요소를 자주 사용하셨다는 점에 대해 논증을 더 추가할 수 있습니다. 네 눈이 너를 유혹하면 빼어 버리라. 기도할 때 작은 방으로 들어가십시오(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집에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궁핍한 자에게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악한 사람을 반대하지 마십시오(그러나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예 또는 아니오 이상으로 말하지 마십시오(그러나 Paul은 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합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6,14-15 과장의 또 다른 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왕국에서 살려면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은 우리가 사랑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제 조건의 충족을 조건으로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말한 것의 목적은 사랑과 용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교훈처럼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로새서 3,13). 이것은 예입니다. 그것은 요구 사항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이미 집에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용서를 받았지만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분이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취를 통해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구원을 기대한다는 의미의 일부입니다.

금식에서 비밀로

예수께서는 또 다른 종교적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하는 중에 백성 앞에 보이려고 얼굴을 가리우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6-18절). 우리가 금식할 때에도 여느 때와 같이 머리를 감고 머리를 빗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다시 한 번 강조점은 태도에 있습니다. 금식으로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금식 중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 주제 모두에 대해 예수님은 같은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든,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그것은 “은밀히” 행해집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하지 않지만 그들에게서 숨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만을 공경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보상은 우리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이며 그의 신성한 선하심에 따라 발생합니다.

하늘에 보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 세상의 덧없는 상급보다 그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상급을 더 소중히 여기자. 공개적인 칭찬은 일시적인 형태의 보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의 덧없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먹으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먹지 아니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지 못하느니라”(19-20절). 세상의 부는 수명이 짧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나은 투자 전략을 채택하라고 조언하십니다. 조용한 자선, 겸손한 기도, 은밀한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영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누군가는 그분이 노후를 위해 저축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우리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저축보다 하늘의 상급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절). 우리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것을 귀히 여긴다면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행실을 인도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빛입니다. 네 눈이 성결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그러나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22-23절). 분명히 예수는 그의 시대의 격언을 사용하여 그것을 돈의 탐욕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것을 바르게 볼 때 선을 행하고 너그럽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적이고 질투할 때 우리는 중독으로 타락한 도덕적 어둠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우리의 은행 계좌는 우리에게 봉사하도록 설정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게 해줍니까? 우리의 목표는 우리를 선하게 이끌거나 부패하게 합니다. 우리의 속이 부패하여 이 세상의 상급만 구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패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신입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길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우리는 하나님과 여론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경쟁 없이 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맘몬을 "섬길" 수 있습니까? 돈이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그녀를 극도로 강력하게 보이게 하고, 그녀가 그것에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이러한 평가는 하나님께 더 적합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안전과 생명의 참된 근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능력이십니다. 그분이 먼저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그분을 소중히 여기고 존경해야 합니다.

진정한 보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 무엇을 입을 것인가. 이방인들은 이 모든 것을 추구합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25-32절). 하나님은 좋은 아버지이시며 우리 삶에서 최고일 때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의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돈이나 물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의 것이 되리라"(33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오래 살 수 있고, 음식이 풍족하며, 잘 보살핌을 받을 것입니다.

마이클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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