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5 : 산상 수훈

380 matthaeus 5 설교 부분 2예수님은 여섯 가지 고대 가르침을 새로운 가르침과 대조합니다. 6 번 그는 이전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대부분 토라 (Torah)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6 번 그는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더 엄격한 정의의 표준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지 마라.

“너희는 [살인]을 죽이지 말라”고 고대인들에게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살인]한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21절). 이것은 민법을 요약한 토라의 인용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 줄 때 그것을 들었습니다. 인쇄 기술 이전의 시대에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읽는 대신 글을 들었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전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시내 산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왜곡된 전통을 인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율법을 인용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계명을 더 엄격한 기준으로 대조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느니라"(22절). 아마도 이것은 토라에 따라 의도된 것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근거로 논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누가 그에게 가르칠 권한을 주었는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은 그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참입니다.

우리는 분노로 판단됩니다. 누군가를 죽이려하거나 다른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더라도 그의 마음에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분노가 죄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은 때때로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화를 낸 사람은 관할권 아래 있습니다. 원칙은 어려운 말로되어 있습니다. 예외는 나열되지 않습니다. 이 시점과 설교의 다른 곳에서 우리는 예수 께서 자신의 요구를 매우 분명하게 공식화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에서 진술을 취할 수없고 예외가없는 것처럼 행동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이니라”(22절).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사례를 언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서기관들이 이미 가르친 문구인 "아무 쓸모도 없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악한 태도에 대한 형벌이 민사 법원의 판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며 궁극적으로 최후의 심판까지 미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마태복음 2장).3,17, 같은 그리스어 단어). 우리는 이 용어를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하는 율법주의적 규칙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요점은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요점은 다른 사람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토라의 목적을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의는 하나님의 왕국을 특징짓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와서 제사를 드리십시오. 예수님은 옛 언약이 여전히 유효한 시대에 사셨습니다. 그분이 구 언약의 율법을 확언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분의 비유는 인간 관계가 제사보다 더 귀중해야 함을 지적합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불리한 점이 있다면(정당한 것이든 아니든) 상대방이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리지 마십시오. 주도권을 잡으십시오. 불행히도 이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새 법을 주시지 않으시고, 화해하기를 힘쓰라는 분명한 말씀으로 원칙을 설명하십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즉시 화목하라 그 대적이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법관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한 푼도 다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5-26절). 다시 말하지만, 법정 밖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는 고발자들이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민사 법정에서 결코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엄격한 법으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또한 빚의 감옥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현명한 조언도 하지 않습니다. 그분에게는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정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탐 내지 마라.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7절).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절)고 말씀하십니다. 10계명은 탐심을 금했지만 7계명은 탐욕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민법과 형벌에 의해 규제될 수 있는 행위인 "간통"을 금지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성경으로 확증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말씀이시며 기록된 말씀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 가지 패턴을 따릅니다. 고대 율법에는 한 가지가 명시되어 있지만 참된 의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핵심을 찌르기 위해 극단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간음에 관해서는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너희 지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당신의 오른손이 당신을 실족케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리십시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가지 아니하는 것이 네게 유익하니라”(29-30절). 물론 몸의 일부를 잃는 것이 영생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우리의 대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눈과 손은 우리를 죄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죄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치료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죄를 제거하기 위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이혼하지 마라.

"또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이혼 증서를 주어야 합니다'(31절). 이것은 성경을 가리킨다. 5. 모 24,1-4, 이혼 편지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이미 확립된 관습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법은 기혼 여성이 첫 남편과 재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이러한 드문 상황 외에는 제한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허용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2절). 그것은 가혹한 진술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나쁜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아내를 내쫓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동적으로 죄인인가? 그리고 이 이혼 피해자와 다른 남자가 결혼하는 것이 죄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불변의 법칙으로 해석한다면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혼에 대한 또 다른 정당한 예외가 있음을 성령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1. 고린도 7,15). 이것은 산상 수훈에 대한 연구이지만 마태복음 5장이 이혼에 대한 마지막 단어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의 일부일 뿐입니다.

여기에있는 예수의 진술은 무언가를 분명하게하려는 충격적인 진술입니다.이 경우 이혼은 항상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혼 생활에서 평생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고, 우리는 의도 한대로 그녀에게 달라 붙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사물이 그들이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해야 할 일에 대해 말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맹세하지 마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를 여호와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3절). 이러한 원리는 구약 성경에서 가르친다(4. 모 30,3; 5. 모 23,22). 그러나 토라가 ​​분명히 허용한 것을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그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과 가깝지 아니하니 이는 대왕의 성임이니라”(34-35절). 분명히 유대 지도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맹세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아마도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하십시오: 예, 예; 아니 아니. 그 위에 있는 것은 악에 속합니다”(36-37절).

원칙은 간단합니다. 정직함 - 놀라운 방법으로 명확해집니다. 예외가 허용됩니다. 예수 자신은 단순한 예 또는 아니오를 넘어섰습니다. 그는 종종 아멘,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지나가되 그의 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단순히 예라고 말하는 대신 맹세에 대한 진술을 사용했습니다(로마서 1,9; 2. 고린도 1,23).

그래서 우리는 산상 수훈의 진술이 문자 적으로 순종되는 것을 금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직해야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특히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한 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현대의 예를 들자면, 우리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선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선서 진술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선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소합니다. 법정에서 이 단어들은 동의어이며 둘 다 예스 그 이상입니다.

복수하지 마라.

예수님은 다시 토라를 인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단지 구약 성경의 복수 중 가장 높은 수준에 불과했다고 때때로 주장됩니다. 사실 그것은 최대값을 나타내지만 때로는 최소값(3. 모 24,19-스물; 5. 모 19,21).

그러나 예수님은 토라가 요구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나쁜 사람들을 반대하셨습니다.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사도들은 거짓 선생들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했습니다. 바울은 군인들이 그를 채찍질하려 할 때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과장된 것입니다. 나쁜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허용됩니다. 예수님은 예를 들어 범죄를 경찰에 신고하는 등 나쁜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진술은 과장된 것으로 여겨 져야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그들을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원칙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입니다. 예외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가정 할 때, 우리는이 규칙들로부터 새로운 법령을 개발하지 않고 우리의 행동에 도전하도록 허용해야합니다.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39b절). 어떤 상황에서는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떠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고전 1장)2,9). 바울처럼 구두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3,3). 예수님은 우리에게 엄격하게 따라야 하는 규칙이 아니라 원칙을 가르치십니다.

“누가 너와 시비를 벌이고 겉옷을 가져가려거든 겉옷도 가져가게 하여라.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천리를 가라고 하거든, 그와 함께 천리를 가십시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0-42절). 사람들이 당신에게 10.000프랑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20.000프랑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차를 훔쳐가더라도 밴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당신에게 10프랑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과장된 말씀은 우리를 희생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익을 얻도록 허용하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보상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보복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십니다. 평화를 이루도록 조심하십시오. 남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증오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3절). 토라는 사랑을 명령하고 이스라엘에게 모든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고 모든 범죄자를 처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왜? 이 모든 엄격한 정의의 모델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라"(45a절). 우리는 그와 같이 되어야 하며 그는 그의 원수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들을 위해 그의 아들을 죽게 했습니다. 원수를 위해 자식을 죽게 할 수는 없지만 자식도 사랑하고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준으로 세우신 기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복된 실패가 어쨌든 우리의 시도를 멈추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게 하시고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시느니라"(45b절)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합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을 얻으리요.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제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라면 특별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느냐?" (46-47절).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서 항상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우리의 소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타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온전하고 모든 사람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고 말씀하실 때 의도하신 것입니다.

마이클 모리슨


PDFMatthew 5 : 산상 설교 (2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