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

22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을 "동시에 죄인과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원래 이 용어를 라틴어 simul iustus et peccator로 썼습니다. Simul은 "동시에", iustus는 "just", et는 "and", peccator는 "sinner"를 의미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가 죄됨과 무죄함에 동시에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루터의 모토는 용어상 모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우리가 결코 죄악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역설을 다루기 위해 은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지만(성도) 완전한 그리스도와 같은 삶(죄인)을 살지는 않습니다. 이 말을 공식화할 때 루터는 때때로 사도 바울의 말을 사용하여 복음의 핵심은 두 배로 세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가 예수님과 우리에게 그의 의로 전가되었습니다. 전가라는 이 법적 전문 용어는 그것이 적용되는 사람의 삶에서 볼 수 없는 경우에도 법적으로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진실인 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루터는 또한 그리스도 자신을 떠나서는 그분의 의가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우리의 통제 아래). 그것은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아들일 때만 우리의 것이 되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은사를 주신 분과 연합함으로써 이 은사를 받습니다 궁극적으로 주는 분이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이십니다 물론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이 한 문장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문장에 동의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The Journal of the Study of Paul and His Letters에 실린 기사에서 J. de Waal Dryden의 비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루터의] 말은 의롭게 된 죄인이 개인 자신의 내재하는 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외적인" 의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원칙을 요약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말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는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성화(기독교인의 삶)의 기초로 간주될 때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인을 계속해서 "죄인"으로 동일시하는 데 있습니다. 명사 페카토르는 기형적인 도덕적 의지나 금지된 행동에 대한 성향 이상을 나타내지만 기독교의 존재 교리를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뿐 아니라 본성에서도 죄가 있다 심리적으로 루터의 말은 도덕적 죄를 경감시키지만 부끄러움을 영속시킨다. 의롭게 된 죄인의 자명한 이미지는 공개적으로 용서를 선포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변혁적 요소를 절대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 자신을 깊은 죄 많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제시할 때 바로 그 용서를 약화시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일상적인 실천으로 강화되는 병적인 자기이해를 갖게 되며, 따라서 이 이해를 기독교적 미덕으로 제시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끄러움과 자기 혐오가 부풀어 오른다. ("Revising Romans 7: Law, Self, Spirit," JSPL (2015), 148-149)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십시오.

Dryden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죄인을 더 높은 지위로 올리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2. 고린도 5,17) "신성한 성품"에 "참가"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습니다.2. 베드로 1,4).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본성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의 양자로 사랑받고 화목하게 된 자녀들입니다. 예수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의 실재를 받아들일 때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항상 불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어떻게 요약하는지 주목하십시오.

내가 살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바울은 예수님을 구원하는 믿음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이해했습니다. 주체로서 그분은 능동적인 중재자이시며 은혜의 창시자이십니다. 대상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믿음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고 우리를 그분 안에서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의 믿음과 충성입니다. 몇 주 전 주간 보고서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조끼를 청소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맡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은혜로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하신 일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은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 희미한 빛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선택하신 우리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사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거룩함과 영광을 포함한 완전한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1. 고린도 1,30).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인 하나님의 입양된 사랑하는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여 은혜를 통한 구원의 이러한 각 측면을 경험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생각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뀝니다. 예: 평소 일상에서 예수님을 어디에 그렸는지 생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정체성의 관점에서 내 삶을 반성할 때, 내 생각은 이것이 내가 예수님을 끌고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이해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의 이러한 변화는 정확히 예수님에 대한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더 가까워질수록 그가 하는 일을 더 많이 공유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감취었다"(골로새서 3,3). 그리스도 안에는 선하심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숨길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면 창조주께서 태초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자기 확신에 찬 존엄성과 목적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이 정체성은 우리를 하나님의 용서로부터의 자유와 더 이상 쇠약하게 하는 수치와 죄책감 속에서 살지 않게 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신다는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살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누구인지의 실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오해하고 해석하는 것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잘못 해석하고 그것을 죄에 대한 자유의지로 여기고 있습니다(이것이 율법주의의 잘못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실수는 주로 사람들이 은혜와 하나님과의 은혜에 기초한 관계를 법적 구성으로 묶으려 할 때 발생합니다(즉, 합법성의 오류). 이 법적 틀 내에서 은혜는 종종 규칙에 대한 하나님의 예외로 오해됩니다. 그러면 은혜는 일관성 없는 순종에 대한 법적 변명이 됩니다. 은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꾸짖는다는 성경적 개념이 무시됩니다. 법적인 행위에는 칭의가 없고 은혜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오해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와 나누시는 은혜에 기초한 복음적 삶과 대조되는 자유롭고 구조화되지 않은 생활 방식으로 이어진다.

은혜로 변경됨

은혜에 대한 이 불행한 오해(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잘못된 결론과 함께)는 죄인된 양심을 달랠 수 있지만,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변화의 은혜, 즉 성령을 통해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 진실을 놓치면 결국 두려움에 뿌리를 둔 죄책감으로 이어집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두려움과 수치심에 기초한 삶은 은혜 위에 기초한 삶에 대한 열악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변화하는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한 말에 유의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우리를 징계하여 경건치 아니한 성품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슬기롭고 정의롭고 경건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티투스 2,11- 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수치스럽고 미성숙하며 죄 많고 파괴적인 삶의 방식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 셨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 하셨으므로 우리가 그의의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와 아들과의 하나됨과 아버지와의 교제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성령을 전할 수있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 십니다. 그는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더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항상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은혜와 지식에 대한 지식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면서 은혜 가운데 성장하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분을 아는 지식이 자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과 경외로 삶을 살 때 은혜로 우리를 용서할뿐만 아니라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덜 필요로하는 것처럼 성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은 모든면에서 그에게 의존합니다. 그는 우리를 깨끗이 씻어서 새 것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있는 것을 배우면서 그분을 더 잘 알게되고 그분과 그분의 방법을 모두 사랑하게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알면 사랑할수록, 죄책감, 두려움 및 수치심으로부터 자유 로워지는 은혜 안에서 쉬는 자유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Paul은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일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는 하나님이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8-10).

우리를 구속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 즉 그의 신실하심임을 잊지 맙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이십니다(히 1장).2,2).    

Joseph Tkach 저


PDF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