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본질

374 은혜의 본질때때로 저는 우리가 은혜를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우려를 듣습니다. 권장되는 시정 조치로서, 은혜 교리에 대한 일종의 균형추로서 성경, 특히 신약 성경에 언급된 순종, 정의 및 기타 의무를 고려할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과도한 은혜”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은 정당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에게 은혜는 의무, 규칙 또는 기대하는 관계 패턴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은총은 어쨌든 모든 것이 미리 용서되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오해에 따르면 자비는 무임승차권, 즉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종의 포괄적인 권위입니다.

도덕률 폐기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는 어떤 법이나 규칙도 없이 삶을 전파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이 문제는 성경과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나치 정권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저서 나흐폴게(Nachfolge)에서 이런 맥락에서 “값싼 은혜”를 말했다. 반율법주의는 신약성경에서 다루어집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은혜에 대한 그의 강조가 사람들로 하여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라"(로마서 6,1). 사도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습니다. 몇 문장 후에 그는 자신에 대한 주장을 반복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지라도!”(v.2).

율법폐기주의에 대한 비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은혜란 모든 것이 믿음으로 덮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왜?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과도한 은혜”가 정말 문제인가? 그리고 그의 해결책은 정말로 그 동일한 은혜에 대한 어떤 종류의 균형점을 갖는 것입니까?

진짜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문제는 은혜가 하나님이 규칙, 명령 또는 의무를 준수한다는면에서 예외를 만든다는 것을 은혜라고 믿는 것입니다. Grace가 규칙 예외 부여를 실제로 암시했다면 너무 많은 은혜로 많은 예외가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를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가진 모든 의무 나 임무에 대해 포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측면에서 자비가 많을수록 예외가 많습니다. 그리고 자비가 적 으면 예외가 줄어들고,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한 계획은 아마도 인간의 은혜가 최고로 할 수있는 것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그러나이 접근이 순종에서 은혜를 측정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서로를 상대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그로 인해 지속적이고 평화로운 Gezerre가 생겨났습니다. Gezerre는 결코 평화를 가져 오지 않습니다. 둘 다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양측은 서로의 성공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계획은 하느님 께서 행하시는 은혜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은혜에 관한 진리는 우리를이 잘못된 딜레마로부터 자유롭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성경은 은혜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신다." 마지막에 바울의 축복 2. 고린도전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리킨다. 은혜는 성육신하신 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며, 그 아들은 은혜롭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우리를 전능자와 화해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성부와 성령의 본성과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의 본성의 참된 각인임을 계시한다(히브리서 1,3 엘버펠트 성경). 거기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라”, “모든 충만으로 그의 안에 거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느니라”(골로새서) 1,15; 19). 그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요 우리가 그를 알면 또한 아버지를 알 것이요4,9; 7).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요한복음 5,19). 그분만이 아버지를 아신다는 것과 그분만이 그분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마태복음 11,27). 요한은 우리에게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 은혜와 진리는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얻었느니라.” 그의 아들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거하시어 “ 우리”(요한 1,14-18).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현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은혜로 충만하심을 말과 행동으로 계시하십니다. 그 자신이 은혜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바로 그 존재로부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의존하거나 우리에게 혜택을 주어야 할 의무를 근거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의 너그러운 본성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혜를 하나님의 후한 선물이라고 부릅니다(5,15-스물; 6,23).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기억에 남을 만한 말로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2,8-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선에서, 곧 그보다 더 작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관대하게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의 행위는 그의 자비롭고 관대한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그분은 피조물의 저항, 반역, 불순종에 직면하더라도 그분 자신의 자유 의지의 선하심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아들의 속죄를 통해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에 대한 용서와 화해로 죄에 응답하십니다. 빛이시요 그 안에 어둠이 없으신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 안에서 자기를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생명을 우리에게 온전히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요일1서) 1,5; 남자 10,10).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를 베푸셨습니까?

불행하게도, 하나님은 원래 자신의 피조물이 특정 조건을 충족하고 그가 부과한 의무를 이행할 때만 그의 친절(아담과 하와, 그리고 이후의 이스라엘)을 베풀겠다고(심지어 타락 이전에도) 약속하셨다고 자주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녀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도 그녀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용서와 영생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잘못된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과 계약적인 "만일...그러면..." 관계에 있습니다. 그 계약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받을 수 있기 위해 인류가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나 의무(규칙 또는 법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전능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이 정하신 규칙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부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그가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그리고 영원히.

이 잘못된 견해는 율법을 하나님의 본성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물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봅니다. 이 신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창조물과 합법적이고 조건적인 관계에 있는 계약 신입니다. 그는 "주인과 노예" 원칙에 따라 이 관계를 수행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용서를 포함하여 선하심과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함은 그것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은 순수한 뜻이나 순수한 율법주의를지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를 보여주고 성령을 보내는 예수님을 볼 때 특히 분명 해집니다. 이것은 예수님 께서 그의 아버지와 성령과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들을 때 분명 해집니다. 그분은 그분의 본성과 성품이 아버지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아버지 - 아들 관계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규칙, 의무 또는 조건의 성취로 특징 지워지 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법적인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귀하는 서로 계약을 맺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타인의 비준수가 동등하게 비 성실하게 처리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계약적이고 법에 기반한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는 터무니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시 한 진리는 그들의 관계가 성스러운 사랑과 충실 함, 자립과 상호 영광으로 표시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7 장을 읽으면서 예수님의기도는 삼위 일체 관계가 모든면에서 하나님의 행동의 기초이자 근원임을 풍부하게 분명히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충실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 인간이 이스라엘과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가 계약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조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if-then 계약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언약, 곧 약속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토라)은 언약이 세워진 지 430년 후에 발효되었습니다. 타임라인을 염두에 두고 보면 율법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의 기초로 거의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그의 모든 선하심을 이스라엘에게 아낌없이 고백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겠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5. Mo 7,6-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축복하고 그를 만민에게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1. 모세 12,2-삼). 성약은 약속입니다. 자유로이 선택되고 주어진 것입니다. 전능자가 이스라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2. Mo 6,7). 하나님의 축복은 일방적이었고, 그것은 그의 편에서 왔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본성과 성품과 본질의 표현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의 이스라엘과의 결별은 은혜의 행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입니다!

창세기의 첫 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창조물을 다루지 않으신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우선, 창조 그 자체는 자발적인 수여 행위였습니다. 존재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좋은 존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훨씬 열등한 자신의 창조물에 자신의 선하심을 아낌없이 베푸십니다. 그는 그녀에게 생명을 줍니다. 하와는 아담이 더 이상 혼자가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친절을 베풀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을 주셨고, 그곳에서 열매를 맺고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돌보게 하여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이 좋은 선물을 값없이 주시기 전에는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신성 모독이 진입 한 가을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선을 행하시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의 불순종, 즉 은혜의 행위 이후에 회개의 기회를주기위한 그의 의도는 아니 었습니까? 또한 하느님 께서 어떻게 옷에 스킨을 주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에덴 동산에서의 그녀의 거부조차도 그녀가 죄 많은 삶의 나무를 사용하지 못하게하는 은혜의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가인에 대한 섭리는 같은 빛 안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준 보호와 무지개 보장에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의 행위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의 이름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법적으로 구속력이있는 작은 계약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은혜는 과분한 자비로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선하심을 자유롭게 공유합니다. 그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의 가장 내적인 존재로부터 영원히 이것을 행한다. 이 삼위 일체를 창조하게하는 모든 것은 그것의 내륙 공동체의 풍요 로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의 법적 및 계약 관계에 기반한 관계는 삼위 일체 창조자와 언약의 저자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을 순수한 우상으로 만듭니다. 우상은 항상 자신의 추종자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자신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사람들과 계약 관계를 맺습니다. 둘 다 상호 의존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만족의 목표를 위해 서로에게 도움이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받지 못한다는 말에 내재 된 진리의 곡식은 단순히 우리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악을 극복합니다.

은혜는 어떤 법이나 의무의 예외로서 죄의 경우에만 작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사실적인 본질에 상관없이 자비 로우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명백한 죄가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가있을 때에도 그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가치가 없다고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창조하신 것을 선을 그만 두지 않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화해 희생 제물 값에 대한 용서를 준다.

우리가 죄를 지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에 신실하십니다.2. 디모데 우스 2,13). 하나님은 항상 자신에게 진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반항할 때에도 우리를 위한 그분의 신성한 계획을 지키십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이 변함없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얼마나 간절한 자비를 베푸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6;8). 은혜의 특성은 어둠을 밝히는 곳에서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죄의 맥락에서 은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비 롭습니다. 그는 자신의 창조물에 충실 함을 입증하고 그의 유망한 운명에 빨리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그의 속죄를 마치 셨을 때 사악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것을 완전히 인식 할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리가 살기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나 고난이나 가장 무거운 굴욕도 그를 거룩하고 사랑으로 태어난 운명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악한 선을 선하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의에 관해서, 선은 정확하게 무엇을해야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물리 치고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은혜가 없습니다.

그레이스 : 법과 순종?

우리는 은혜에 관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인 약속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면 답은 거의 자명하고, 약속은 누구에게든 응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이러한 반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 문맥에서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찬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토라)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최종적으로 성취되기 전(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 이 단계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명시했습니다. 전능하신 이스라엘은 은혜로 언약(옛 언약) 안에 있는 생명의 길을 나타내셨습니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현상금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녀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바울은 그녀를 "선생"(갈라디아서 3,24-25; 군중 성경). 그러므로 전능하신 이스라엘이 베푸신 은혜의 은혜로운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율법은 약속된 단계(새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취되기를 기다리는)에서 은혜의 언약이었던 옛 언약의 틀 안에서 제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모든 민족을 위한 은혜의 선구자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의 백성들과 동일한 비계약적 관계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의 속죄와 화해의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의 미래 왕국의 모든 혜택을 제공받습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이러한 은총을 제공하는 것은 반응을 요구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보여야 하는 바로 그 반응입니다. 바로 믿음(신뢰)입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틀 안에서 우리는 약속보다 그 성취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합니까? 대답은 "약속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히브리서 11장)에서 그러한 삶의 방식의 예를 발견합니다. 약속했거나 실현된 언약을 신뢰하며 살지 않는다면 결과가 따릅니다. 언약과 그 창시자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면 그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자신감 부족은 그녀의 생명의 원천인 생계, 복지, 다산을 박탈했습니다. 불신은 하나님과 그의 관계를 너무 많이 방해하여 전능자의 거의 모든 은혜에 대한 몫을 거부당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왜? 전능하신 분은 그에게 신실하시며 큰 대가를 치르실 때에도 그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말씀에서 돌아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그의 피조물이나 그의 백성에게 이질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강요받을 수 없습니다. 약속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부족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자신에게 불성실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행하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와 관련된 모든 지시와 계명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순종해야 하며, 거저 주어지는 친절과 은혜입니다. 그 은혜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헌신과 계시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면 전능하신 분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약에서 발견하는 지시(계명)는 새 언약의 기초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순종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러면 순종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언약의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존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시는 유일한 형태의 순종은 순종이며, 이는 전능하신 분의 불변성, 말씀에 대한 충실성,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성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납니다(로마서 1,5; 16,26). 순종은 그분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토라의 특정 법적 요구 사항을 준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순종의 행위가 목표에 도달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믿음의 도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그의 진술에서 특히 분명합니다. 가져오다”(로마서 9,32; 좋은 소식 성경).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인 사도 바울은 하느님께서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의 의를 이루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에게 주시기를 원하신 의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의 의에 참여하는 것과 비교할 때, 그것은 (말하자면!) 무가치한 더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빌립보서 3,8-9).

여러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그의 백성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왜요? 그가 은혜로우시므로(빌립보서 3,8-9). 그렇다면 이 선물을 어떻게 우리에게 무료로 제공할 수 있습니까? 이 점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오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소망,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경전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순종에 대한 부름과 옛 성약과 새 성약에 나오는 계명은 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 약속에 따라 실제로 참되고 진실한 삶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삶은 신뢰에 기초하지 않거나 아마도 (여전히) 약속된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직 이러한 형태의 순종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의 일부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대에 응답하기를 거부하신 데 분명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니오"에 "아니오"로 응답하실 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방식입니다.2. 고린도 1,19). 그리고 전능자의 "아니오"는 그의 "예"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의 "예"만큼 강력하게 효과적입니다.

은혜의 예외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더 높은 목적과 신성한 목적에 관해서 예외를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분의 아들의 완전성 안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행실에서 이것을 온전히 발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믿지 않는 마음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우리의 삶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반영합니다. 그분의 온전한 사랑은 우리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절대적인 칭의와 궁극적인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빌립보서 1,6).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말하자면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두실 것입니까? 천국에서는 예외가 규칙이라면, 여기에는 믿음의 부족, 거기에는 사랑의 부족, 여기에는 약간의 용서하지 못함, 저기에는 약간의 비통함과 분개, 여기에 약간의 분개, 저기에 약간의 오만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때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게 될까요? 글쎄, 지금 여기와 같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그러한 "비상 사태"에 영원히 내버려 두신다면 정말 자비롭고 친절하실까요? 아니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은혜 자체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뜻의 지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가르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교만해서 대적하기보다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안에서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전능자는 자신과 자신의 선한 목적에 충실할 것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자비, 본성과 목적을 염두에 두신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에 대한 어떤 반대에도 융통성 없으실 것이라는 지식으로 그들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 결과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은혜의 충만함에 참여하고 그분의 자비로 뒷받침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충분히 인식하고 관련된 "약속"에 기쁘게 들어갈 것입니다.

닥터. 게리 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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