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을위한 자비

모두를위한 209 자비애도의 날, 1일에4. 2001년 월 일, 미국과 여러 나라의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위로와 격려와 소망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긴 이 나라에 희망을 주려는 의도와는 달리 보수적인 기독교 교회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실수로 절망과 낙담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퍼뜨렸습니다. 즉, 공격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아직 그리스도께 고백하지 않은 친척이나 친구를 위한 것입니다. 많은 근본주의자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고 죽는 사람은 평생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죽은 후 지옥에 갈 것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분을 사랑, 은혜,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 중 일부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작은 글씨가 나옵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 기본적인 회개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자비로우신 구세주께서 당신을 영원히 고문하실 것입니다."

좋은 소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좋은”에 중점을 둔 좋은 소식 (그리스어 euangélion = 좋은 소식,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메시지 중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그것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알게 된 소수에게 좋은 소식 일뿐만 아니라;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희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예외없이 모든 인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인의 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1. 요하네스 2,2). 창조주는 또한 그의 피조물의 화해자이시다(골로새서 1,15-20). 사람들이 죽기 전에 이 진리를 알게 되는지 여부는 그 진실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이나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 3,16, 개정된 루터 번역, 표준판의 모든 인용).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것, 즉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그것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에 들어가리라

여기에는 이 믿음이 육체적인 죽음 이전에 와야 한다는 말이 한 마디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아니오: 구절은 신자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신자도 죽기 때문에 "멸망"과 "죽음"이 하나가 아니며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막아주지만, 죽지 않게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의 멸망은 헬라어 appolumi에서 번역된 것으로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최후의 전멸, 근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런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맞이하지 않고 내세(아이온)의 생명(소에)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걷는 자로서 그들의 생애 중에 죽을 것이며 다가올 시대의 생명, 왕국의 생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낼 정도로 사랑했던 "세상"(kosmos)의 소수를 대표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어떻습니까? 이 구절은 믿지 않고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없거나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죽음이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거나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을 영원히 막을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해석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죽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브리서 9,27).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싶은 심판자는 다름 아닌 사람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창조주와 화해 자

신은 산 자를 구원할 수 있고 죽은 자는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는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지요, 그렇죠? 하나님은 세상을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는 지옥을 위해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요한 3,17).

공격이 있은 후 일요일인 16월 일에 한 기독교 교사는 주일학교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만큼 미움도 완전하십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이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원론(우주에서 선과 악이 동등하게 강력한 두 가지 힘이라는 생각)는 이단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원론을 신에게로 옮기고 있으며 완전한 증오, 즉 완전한 사랑의 긴장을 운반하고 구현하는 신을 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며 모든 죄인은 심판과 정죄를 받지만 복음,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죄와 이 심판을 담당하셨다는 신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실제로 지옥은 현실이고 끔찍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이 무서운 지옥이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2. 고린도 5,21; 마태복음 2장7,46; 갈라디아서 3,13).

모든 사람이 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로마서 6,2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십니다(같은 구절). 그래서 은혜라고 합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죄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the many', 즉 모든 사람, 모든 사람; 아담의 죄 외에는 없느니라]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다시: 모든 사람,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넘쳤나니”(로마서 5,15).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죄의 형벌이 가혹하고 그것이 매우 가혹할지라도(평결은 지옥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은혜의 선물에 뒷자리를 차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속죄의 말씀은 아담 안에 있는 그분의 정죄의 말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2. 고린도 5,19 말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세상[모든 사람, 로마서의 '많은 사람']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5,15] 자신과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전가하지 않았습니다 ...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친구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복음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죽음에 대한 격려를 줍니까? 사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이끌 것입니다"(요한 12,32). 그것은 좋은 소식, 복음의 진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시간표를 세우지 않으셨지만 죽기 전에 그를 알게 된 소수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골로새서 1,20).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것은 제한된 수의 택함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좋은 소식입니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단지 몇 가지 새로운 신학적 사상을 가진 흥미롭고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름 아닌 만물의 창조주요 유지자이시며(16-17절), 더욱이 그분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세상에서 그릇된 만물을 완전히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20절)! 그리스도 안에서 – 바울은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궁극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 언젠가 순수한 은혜의 행위로 모든 죄를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용서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도행전 1장 참조).3,32-스물; 3,20-21; 이사야서 4장3,19; 개정 21,5; 로마인 8,19-21).

오직 그리스도인

“그러나 구원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근본주의자들은 외칩니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누구입니까? 표준적인 회개와 회심 기도를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사람들입니까? 침수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만 그런 것입니까? "참된 교회"에 속한 사람들만 있습니까? 정식으로 서품된 사제를 통해 사면을 받은 사람들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만? (네가 만들었니? 내가 만들지 않았어.) 죽기 전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못 박힌 손에 심판을 내리신 예수님 자신이 은혜를 베푸는 자의 몫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입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원하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실 수 있는 그분이 언제 누군가를 믿게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참된 종교의 전지전능한 옹호자들을 만날 것인지를 결정합니까? 대신 결정?
모든 기독교인은 어느 시점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즉, 성령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입장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같다. 그러나 기다리십시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또 그는 우리 죄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시는 속죄 제물이시니(1. 요하네스 2,2).

큰 격차

"그러나 나사로의 비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반대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옆구리와 부자의 옆구리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없는 큰 구렁이 있다고 하지 아니하였느냐?”(누가복음 1장 참조)6,19-31.)

예수께서는 이 비유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사진적 묘사로 이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묘사할까요? 이 비유는 부활 이후의 삶의 초상이 아니라 세기 유대교의 특권층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입력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읽기 전에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을 비교해 봅시다. 11,32 Schreibt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나사로보다 지위와 계급이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여전히 나사로에게서 그를 섬기기 위해 거기에 있는 사람만을 봅니다. 아마도 그 틈을 메울 수 없게 만든 것은 부자의 계속된 불신 때문이지 어떤 자의적인 우주적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 자신만이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로 연결되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심연을 닫아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 즉 구원은 오직 자신을 믿음으로만 온다는 비유의 진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십니다. 누가복음 1장6,31).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해자이시며 믿거나 말거나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요한 3,17), 세계 일부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16절) – 천 명 중에 한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께는 길이 있으며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더 높습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3). 그가 원수를 사랑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아니면 예수께서 원수를 미워하시지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시고 그의 미움이 지옥의 존재를 설명한다고 믿어야 합니까? 그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누가복음 2장).3,34).

물론 예수님의 은혜를 알면서도 거절하는 사람은 결국 어리석음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만찬에 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어둠 외에 다른 곳이 없습니다.2,13; 25,30).

모든 사람을위한 자비

로마서(11,32) 바울은 놀라운 진술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자비를 받습니다. 수락 여부; 죽기 전에 알든 모르든.

이 계시에 대해 다음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이해할 수 없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불가해한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또는 '하나님이 그에게 상을 주시기 전에 누가 그에게 무언가를 주었습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아멘”(33-36절).

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복음이 너무 좋다고 믿을 수 없다는 그의 방식이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하나님의 생각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이므로 우리는 죽음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곧 지옥으로가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의 지식의 지평선 하늘을 초과하는 일을하고있다 :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 된 비밀 - 반면에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정도가 단순히 유형 아님을 분명히하고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것을 의도하셨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1,9-10). 그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과 다윗을 택하시고 언약을 세우신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3,5-6). 하나님은 또한 "이방인"과 비이스라엘인(2,12). 그는 악인도 구원하신다(로마서 5,6). 그는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끕니다(요 12,32). 세계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부터 "뒤에서" 일하시며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구속의 일을 하셨습니다(골로새서 1,15-20). 하나님의 은혜에는 종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종종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논리가 있습니다.

구원의 유일한 길

요컨대,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그분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시간에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십니다. 인간의 지성이 실제로 파악할 수 없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즉, 우주 어디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바울에 의해 창조되지 않고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5-17). 궁극적으로 그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합니다. 예수는 그들을 거부하지 않지만(그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고 용서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거부합니다.

CS Lewis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 운명을 선택했습니다. 이 자기 결정 없이는 지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기쁨을 찾는 영혼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찾는 자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The Great Divorce, 9장). (1)

영웅이 지옥에 있니?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1의 의미에 대해 말했을 때1. 월 일 설교를 들었을 때, 저는 불타는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적인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을 기억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일치합니까? 기독교인들은 이 구원자들을 영웅이라 부르고 희생할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으면 그들은 지금 지옥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까?

복음은 먼저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고 세계 무역 센터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이 죽은 후에 만날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손에 못 구멍이 있는 재판관이시며, 그에게 오는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껴안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에베소서 1,4; 로마인 5,6 10). 지금 믿는 우리에게도 그 부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님 앞에 서는 사람들은 왕관을 보좌 앞에 놓고 그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일부는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사랑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의 대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당신의 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수치 이상입니다. 그것은 우주적 규모의 재앙입니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암탉처럼 그녀를 품에 안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허용됩니다 - 우리가 로마서 1을 가지고 있다면4,11 그리고 빌립보 사람들 2,10 믿으십시오.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기듯 기꺼이 예수님의 '팔'로 달려갈 것이라고 가정하십시오.

예수님이 구원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은 포스터와 스티커에 "예수님이 구원하십니다"라고 씁니다. 맞다. 그는 그것을 한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시작이시며 완성자이시며, 창조된 모든 것, 즉 죽은 자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시며 목표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하지 않으셨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를 보내셨다(요한 3,16-17).

어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1. 디모데 우스 2,4; 2. 베드로 3,9), 일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아야 할 다른 것은 -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항상 사람들을 위한 것, 즉 그들의 창조자이자 화해자인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물망을 뚫고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옥에 가도록 만들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가 지옥에 간다면 - 영원의 영역의 작고 무의미하고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예비하신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완고하게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그는 싫어합니다). 신이 복수하기 때문이 아니다(그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가 1) 하나님의 나라를 미워하고 그의 은혜를 거절하고, 2) 하나님께서 그가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망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긍정적 인 메시지

복음은 절대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개종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지옥의 위협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저 좋은 소식인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을 파괴하는 모든 것에서 당신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위험하고 잔인하고 예측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세상만 있는 것처럼 계속 살고 싶습니까?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맛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그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는 이미 당신의 죄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결코 알지 못했던 내면의 평화를 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당신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는 당신에게 휴식을 줄 것입니다. 그를 믿어 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지가 너무 좋아서 말 그대로 우리에게서 뿜어져 나옵니다. 로마서 5,10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자랑하노라.”

궁극의 희망! 은혜의 궁극! 그리스도는 죽으 심으로 원수를 화목 케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식탁에 아무 자리도없는 것처럼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미 그들을 화해 시켰고 집에 갈 수 있고 집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사람이들을 수있는 최고.

J. 마이클 페이 자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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